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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질을 자랑하는 서어나무



서어나무 숲에서 / 복효근


서어나무 숲에 왔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환경부와 유한 킴벌리가 ‘아름다운 마을 숲 상’을 주었다고 하나
숲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을 주지 않았어도 그럴 것이다
나무들은 그냥 서 있다
그냥 서어나무다

들으니 이 놈들은 목질이 약해서 부러지거나 다친 곳이 쉬 썩는단다
썩은 자리에 매미나 벌레의 유충이 살아서
딱따구리나 크낙새 등속이 서어나무숲에 산단다
낯선 사내가 들어서자 은유처럼
숲은 제 상처에서 새를 날려보낸다

나무들은 하늘 혹은 그 너머와 무슨 내통이나 하듯
긴 긴 안테나를 뽑아올리고 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 표정이다
그러니 짐승처럼 상처를 안고서도
누구든 이 숲에 들어서서는 서어 있어야 한다

휴대폰이 울린다
받지 않는다 부재중 001통화가 찍힌다
숲이 커다란 무덤 같다
현실現實이 현실玄室이 되어
나는 시방 부재중이다

누가 상을 주어서도 술 한 잔 주어서도 아니다
잠시 서있을 뿐으로 나는 숲의 일부이어서 서어나무이어서
내 안 어디에선가 새 나는 소리 들린다
피안이 목마르게 그립지 않다
부재중인 나를 영영 찾고 싶지도 않다

숲을 나서는 내가 새 것이겠다


 지금까지 가본 곳만 포스팅을 하다가 오늘은 가보고 싶은 곳에 대해 글을 씁니다. 제 여자친구의 부모님이 모두 남원 운봉읍 출신입니다. 그래서 가끔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곤 하는데, 서어나무 숲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조만간 운봉에 갈 생각입니다. 가기 전에 서어나무에 대해 알아두고자 합니다. 그리고 복효근 시인의 '서어나무 숲에서'를 읽습니다.


이번에는 숲 속의 보디빌더, 울퉁불퉁한 근육을 지닌 서어나무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서어나무는 서목(西木)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유래는 찾을 수 없으나 ´서쪽에 있는 나무´란 뜻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어나무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모양새를 가진 나무입니다. 분명히 여러분들도 이미 몇 번씩은 보셨으리라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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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나무의 수피는 다음과 같습니다. 울퉁불퉁~ 보디빌딩을 아주 오래한 근육질의 사나이 같죠? 이처럼 서어나무의 수피는 보통 나무의 그것과는 달리 회색을 띠며, 근육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서어나무의 잎은 어른 검지손가락 정도의 크기이며, 모양은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는 타원 모양입니다. 열매 역시 어른 검지손가락 정도의 크기이며 아래로 축 처져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실 때는 작은 나뭇잎들이 뭉쳐 있는 것처럼 폭신해 보이지만, 실제로 만져보면 뭐랄까요... 조금 푸석푸석한 느낌이 난다고 할까요?

이러한 서어나무는 우리나라의 중부지방 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서어나무는 추운 날씨에도 잘 견디고,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여서 주변에 큰 나무들이 있어 햇빛을 잘 받지 못해도 꿋꿋이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라는 책제목처럼 생김새도 그렇거니와, 사실상 목재로서 별 쓰임새가 없어서 많이 잘리우지 않은 탓인지 산에 가시면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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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로 축 처진 열매 ⓒ데일리안 이연대

이렇게 보면 서어나무는 무척이나 흔한 나무구나 하실 수도 있을텐데요, 실제로 등산을 즐겨하시지 않는 분이라면 이 나무를 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바로 서어나무는 공해에 대한 저항성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심지에는 잘 심지 않지요. 서어나무를 보시려면 가까운 수목원이나 산을 찾아가 보세요. 그러면 이 근육질의 사나이를 쉽게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숲 국민운동´이 개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전북 남원 운봉읍 행정리의 마을숲은 5백여평의 땅에 태고의 신비와 원시적 정취를 느끼게 하는 서어나무 2백여그루가 가득 들어차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서어나무 군락은 "5백여년전 이 마을에 극심한 전염병이 돌아 주민들이 죽어가자 마을을 지나던 한 스님이 서어나무를 심으면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해 주민들이 나무를 심고 지극정성으로 가꿔왔다." 는 전설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자...이만하면 숲속의 근육맨, 서어나무에 대해서 잘 아셨겠죠? 다음번에 산에 오르셔서 서어나무를 만나게 되신다면 울퉁불퉁한 근육을 한번 쓰다듬어 보는 것도 좋겠네요.

데일리안광주전남 http://www.dailian.co.kr/g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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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간에 놓인 다리


 익산 금마에서 왕궁리 오층석탑 쪽으로 차를 몰고 가다보면 거대한 석불의 뒷통수를 볼 수 있습니다. 논 한 가운데서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도리 석불입상입니다. 석불 두 기가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소리라도 질러서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죠. 그러나 손을 잡을 수도 없고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가깝고도 먼 200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견우와 직년처럼 마주보고 서 있습니다. 그저,
 여기에 얽힌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이 둘은 각각 남자(서쪽)와 여자(동쪽)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안고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불은 고려시대 말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철종 9년(1858)에 익산 군수로 부임해온 최종석이 쓰러져 방치되어 오던 것을 현재의 위치에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그 때 씌어진 「석불중건기」에 적힌 내용은 이렇습니다.

 "금마는 익산의 구읍자리로 동ㆍ서ㆍ북의 삼면이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데, 유독 남쪽만은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하게 생겼기에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고 한다."

 불상이라고는 하지만, 참 못생겼습니다. 기둥 같은 몸통에 네모난 얼굴, 가는 눈, 소박하게 웃는 모습에 눈을 찢어져 있습니다. 사시사철 들판에 서서 벼가 익어가는 모습과 또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애틋한 사랑에도 이유가 있을텐데요. 이 돌부처들이 서로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마주보고만 사랑할까요? 사로 마주보며 말없이 지켜보는 게, 우리네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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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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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이 보이시죠?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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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m, 그들의 사랑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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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비비정의 모습

 역사로만 기억되는 길이 있습니다. 이젠 누렇게 색이 바랜 옛 지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수천년 동안 민족의 핏줄이 되어준 옛길들. 우리의 조상들은 지방을 대표하는 가장 ‘큰길’에 ‘대로’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을 주심으로 전국으로 뻗어 있던 구대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봇짐을 등에 둘러 맨 보부상과 입신양명을 꿈꾸며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던 선비들이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대로. 그 길 위에는 주막과 원과, 객주가 생겨났습니다. 현재의 지명 가운데 ‘원’ 자가 붙은 곳(이태원, 노원, 장호원)과 주막거리, 구역터, 역말과 같은 지명을 가진 지역은 모두 옛 대로에 있던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세상이 바뀌고 아스팔트길과 길쭉한 도로가 생겨나고 철로가 놓이면서 우리의 옛길은 조금씩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나 개발이 더딘 지방에서는 형태로나마 옛길을 보전하는 곳이 많습니다. 구대로 중에서도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영남대로와 호남대로(삼남대로)는 민족 이동의 근간이자, 왜군의 침탈을 막는 가장 중요한 대로였다고 합니다.
  서울 한양을 출발해 용인-충주-문경-상주-구미-대구-청도-밀양-삼랑진-양산-부산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대동지지’ 원래 이름은 동남지동래사대로(東南至東萊四大路), 일명 동래로라고도 불리며 950리 길 위에 있던 옛 역과 원 이름의 절반 정도는 마을의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양에서 전남 해남 우수영까지의 호남대로는 일명 해남로로 불리며, 구대로 중에선 팔대로(八大路)에 해당합니다. 한양 동작진-남태령-과천-안양-수원-평택-천안-공주-논산-김제-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에 이르는 970리나 굳센 줄기처럼 뻗어 있습니다.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들의 통행로가 바로 영남대로였으며, 과거 급제한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춘향을 찾은 길이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제주도 유배길이 호남대로였다고 합니다.

  제가 찾은 곳은 호남대로의 눈곱만큼 작은 일부입니다. 어쩌면 호남대로를 걷다가 지친 이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만경강 상류가 길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반대로 걸었습니다. 전주 쪽이 아닌, 삼례 쪽에서 길이 끊기는 지점을 찾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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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에서 비비정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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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 향이 옛길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비비정 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삼례읍 중심지를 통해 가야합니다. 익산으로 향하는 국도 1호선을 만나게 되지만 옛길을 호남고속도로와 나란히 삼례중앙초등학교 옆을 지납니다.
  삼례는 동학농민혁명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1894년 9월(음력) 10만여 농민군이 항일 투쟁의 깃발을 앞세우고 재집결한 2차 봉기 장소입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일본군과 탐관오리를 아내기로 결의한 농민군들은 삼례뜰에서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이에 앞서 1892년 11월(음력)에는 동학교도 수천명이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탄원하기 위해 모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라고 불리웁니다.
  삼례집회는 전라감영의 무력진압을 각오한 것으로 실은 탐관오리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이들은 삼례역에 모여 두차례 전라감영에 의송(議送)을 보내 동학 교조의 신원(伸寃)을 할 것과 동학도에 대한 수탈 중지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삼례집회는 본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동학도에 대한 부당 주구금지 조치를 얻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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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으로 가는 국도 1호선을 건너 비비정으로 향합니다.


  이곳에 오르면 전주시내와 호남평야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앞으로는 한내가 흐르고 주변으로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풍광이 대단히 아름답습니다. 옛 조상들은 이곳을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 했다. 양반들은 이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며 정취를 달랬다고 합니다. 깊고 천이 넓어 군산, 부안에서 온 소금배와 젓거리배가 쉴새 없이 오르내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낚시꾼만이 다녀갑니다. 호남대로는 비비정 옆 언덕을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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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가 펼쳐집니다. 오른편으로 월드컵경기장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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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기차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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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내가 유유히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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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교입니다. 전주를 오가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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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스팔트 길이 옛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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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선이 지나는 철교. 왼쪽으로 보이는 길이 옛길입니다.


  전라선 철도도 동산농장에서 생산되는 쌀을 반출하기 위해 부설된 사설 협궤 철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산농장이 있던 곳에는 전주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섰습니다. 옛길은 완주군 삼례읍을 지나 구정·용정·용덕마을을 지나면서 평야지대를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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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선이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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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탈의 상징이었던 철로와 우리 민족의 옛길이 나란히 달립니다.

 
  더이상 갈 수 없었습니다.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었습니다. 날씨마나 좋았다면 더 월드컵경지강까지 선명하게 보였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옛길은 전북의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의 서쪽 변두리를 지납니다. 그러니까 제가 걷고 있는 저 반대편 길 말입니다. 그곳은 호남대로라는 옛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지나는 옛길은 한적한 2차선 도로로 변했습니다. 한 기사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원이 있었다 해 붙여진 전주시 원동을 지난 옛길은 전주∼군산간 국도 26호선과 교차한다. 국도 26호선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길이다. 봄이면 전국에서 가장 긴 일백리 벚꽃터널을 이룬다. 벚나무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재일교포들이 전해준 것이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든 길에 재일교포들이 일본의 나라꽃을 심은 길은 이제 전주와 익산, 군산을 연결하는 산업도로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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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정입니다. 옛날 조상들은 이곳에서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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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읽어보니, 과거객들도 이곳에서 쉬었다 가곤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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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내를 건너 이런 오르막을 올라 비비정으로 향했겠지요.


  옛길을 걷고 돌아오는 길. 과거객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날마다 시험을 치는 듯합니다. 아니면 봇짐을 등에 짊어맨 보따리 장사일까요? 어깨가 무겁습니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오는 날입니다. 이 역사를 계속 이어나가는 게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요? 여러가지 문제로 전국이 왁자지껄 합니다. 호남대로에 찍힌 조상의 수없는 발자국에게 부끄럽지 않는 민족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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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숲, 한국의 명산](53)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  경향신문


전라북도에 위치한 변산은 우리나라 유일의 반도공원이다. 산이지만 바다와 산을 동시에 품고 있다.

산을 낀 곳을 내변산이라 하고 해안쪽은 외변산으로 부르며 이를 통칭해 변산반도라 일컫는다. 변산반도는 부안군의 보안면, 상서면, 진서면, 변산면, 하서면 등 5개면이 연접되어 있는 서해바다쪽으로 돌출된 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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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폭포



변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해안의 길이가 98㎞에 이른다. 산과 들과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명소로 전북의 대표 관광지다. 1987년까지는 도립공원으로 부안군에서 관리하였으나, 88년에 우리나라의 20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됐다.

호남정맥에서 나뉘어 온 하나의 산줄기가 서해로 튕겨나온 듯한 변산반도 내변산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와 그 사이 직소폭포·봉래구곡·낙조대 등 절경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그 주변에는 유천도요지·구암 지석묘군·호벌치·우금산성 등의 역사 유적지와 내소사와 월명암이라는 역사깊은 사찰이 있다

반도의 중앙에 쌍선봉(459m), 동쪽은 내소사 뒷봉오리 세봉(능가산), 북쪽은 최고봉인 의상봉(508m), 남서쪽에 갑남산이 자리잡는다. 이 외에도 변산에는 깃대봉·낙조대·북재·망포대 등 아기자기한 낮은 산들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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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전나무길

대부분의 봉우리들이 바위로 이루어져 기묘함을 더하고 그 사이의 계곡에는 폭포·소·담·여울이 어울려 아름다움을 보태준다. 95년 내변산에 부안댐이 완공되어 물이 차면서 중계계곡이 호수로 변해, 천연적인 단애를 이룬 기암괴석과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내변산의 직소폭포는 30m 높이에서 힘찬 물줄기가 쏟아진다. 폭포 아래에는 푸른 옥녀담이 출렁대며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봉래구곡이라 부른다. 곳곳의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백천내로 변산댐에 이르면서 곳곳에 시원한 경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외변산은 변산의 바깥쪽인 해안방향을 말한다. 주로 암석해안의 단층들이 볼거리다. 외변산에는 5곳의 해수욕장이 있다. 내변산이 산이 있어 운치가 있다면, 외변산에는 바다가 있어 낭만이 있다. 죽막, 궁항, 상록해수욕장, 모항해수욕장 등 크고 작은 모래사장들이 있으며 수심이 낮아 가족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최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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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사

변산에 갈 기회가 있을 때 변산팔경을 꼭 염두해 두고 여행길에 오르면 더 즐겁다. 제1경은 곰소 앞의 웅연강에서 물고기를 낚는 낚시꾼의 풍치를 일컬었다. 제2경은 직소폭포로 내변산의 옥녀담 계곡에 있는 폭포다. 제3경은 내소사의 은은한 저녁 종소리와 어우러지는 울창한 전나무숲의 경치를 말한다. 4경은 쌍선봉 중턱의 월명암에서 내려다보이는 안개 낀 아침 바다의 신비로움을 담고 있다. 5경은 채석강에 있는 층암절벽의 장관과 그 아래의 푸른 바다에 돛단배를 띄우고 노니는 선유를 일컫는 말이다. 6경은 지지포에서 쌍선봉까지 산봉우리의 진경을 말한다. 7경은 개암사와 우금산성·묘암골의 유서깊은 유적지와 아름다운 경치를 뜻하며, 마지막 8경은 월명암 뒤의 낙조대에서 황해 바다로 해가 지는 장엄한 낙조를 의미하고 있다.

내소사~월명암 코스 산행후 채석강 보면 ‘변산 완전정복’

변산으로 오는 길은 정주에서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내려서서 부안으로 오는 방법과 천안~공주~부여~금강하구둑~김제~부안의 순서로 부안에 도착한 뒤 다시 격포로 가는 길인 30번 도로를 이용해 내소사로 오면 된다.

변산을 보려면 내소사에서 관음봉으로 올라간 뒤 암릉을 따라 계곡으로 내려 선 다음 봉래구곡으로 들어서서 직소폭포를 보고 직소폭포 아래 옥녀담·선녀탕·저수지를 지나 봉래구곡광장에 이른 뒤 월명암~낙조대~쌍선봉을 올라야 한다.

쌍선봉에서 지서리로 내려서든지 우회해서 망포대~신선대를 거쳐 다시 석포리 원암 내소사로 내려서는 방법도 있다. 내소사~직소폭포~월명암 축이 변산산행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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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은 바깥으로 산이 둘러쳐지고 안으로 계곡이 오밀조밀하게 형성돼 있다. 개울의 수량은 많고 개울 자체의 길이도 예상 외로 길다. 그러나 내소사~관음봉~직소폭포~월명암축에 변산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물상들이 상당부분 포함돼 있어 변산에 와서 이곳을 산행하고 채석강을 보았다면 자연경관은 둘러본 셈이 된다.

여기에 내소사나 개암사와 같은 단아하고 짜임새있는 절을 관람하고 절의 유래와 절이라는 형식의 온갖 문화유산들을 하나씩 살피고 간다면 변산산행은 충실한 것일 수 있다.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는 고려 숙종때 창건한 절이다. 이 사찰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개암사대웅전(보물 292) 등이 있다. 변산면 석포리에 있는 내소사는 신라때 창건한 고찰로 대웅보전(보물 291), 고려동종(보물 277), 법화경절본사본(보물 278), 내소사삼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24)등을 소장하고 있다.

< 부안 | 박용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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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주한옥마을


 을사조약(1905년)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밖이었습니다.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죠. 서문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群街道)가 개설(1907년)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죠.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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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장구목 요강바위


I ♡ KOREA  뉴스로 재송고하였습니다.



 높이 2m, 폭 3m고 무게가 무려 15톤이나 되는 바위가 도둑 맞았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도둑 맞은 바위가 4년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세요? 제가 더욱 믿기 힘든 사실은 저 큰 바위를 섬진강의 줄기가 수백년, 수천년 동안 뚫어 왔다는 것입니다. 강물은 가끔 여울지고, 또 가끔은 느긋하게 흘러갔을 뿐인데, 바위에 구멍이 났습니다. 다 큰 어른이 들어가도 충분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비라도 내려 구멍 속에 빗물이라도 고이면, 꼭 요강처럼 보여 요강바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바위. 물과 세월이 만들어낸 힘을 몸으로 벼여주고 있는 바위. 졸졸졸, 요강바위를 아시나요?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에 보면 < 섬진강 기행 > 이라는 김훈의 기행문이 있습니다. 이 글은 김훈 소설가가 섬진강 상류를 따라 자전거로 여행한 기행문입니다.. 때묻지 않은 섬진강 상류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글이다. 물안개로 유명한 섬진강 상류 옥정호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기행문은 < 자전거 기행 > 의 일부분입니다.

 장구목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요강바위는 내룡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처럼 받들고 있는 돌입니다. 요강처럼 가운데가 움푹 패인 이 바위는 높이가 2m, 폭 3m고 무게가 무려 15톤이나 됩니다. 한국전쟁 때 마을 주민들 중에는 바위 속에 몸을 숨겨 화를 모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움푹 패여 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앉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등의 여러 이야기를 간직한 요강바위는 장구목 마을의 상징물입니다.
 언젠가 이 바위를 누군가 감쪽 같이 훔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황당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20 여 명의 사람들이 중장비를 끌고 와서 무게가 25톤이나 되는 요강바위를 몰래 뽑아갔다. 도둑들은 요강바위를 경기도의 한 야산에 숨겨 놓고 살 사람을 물색했다.놀랍게도 바위 값은 10억 원이 넘었다.  수백 년 세월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해 온 요강바위가 사라지자 장구목 주민들은 분개해서 바위를 찾아나섰다.수소문 끝에 야산에 숨겨진 바위를 찾아내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도둑들이 시치미를 떼는 바람에 마을 주민들은 법정 공방전까지 벌이며 눈물겨운 싸움 끝에 요강바위를 돌려 받았다. 그동안 요강바위는 전주지검 남원지청의 마당에 운반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민들이 남원에서 장구목까지 바위를 옮기려고 하니 중장비 사용료가 5백만 원이 든다고 했다.그러자 장구목에 사는 12가구가 돈을 각출해서 운송비를 마련했고, 마침내 요강바위는 4년 만에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구목 요강바위 실종사건

 섬진강의 상류,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를 가면 요강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요강바위 뿐만이 아닙니다. 강물 바닥에 깔려 있는 바위 모두, 강물과 세월이 만든 힘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섬진강의 힘일까요?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강물처럼 힘이 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위처럼 마음을 내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약해보이지만 바위를 뚫은 강물과 단단해보이지만 마음을 내어준 바위. 장구목에서 저는 한참 생각에 빠졌습니다. 졸졸졸, 제 마음도 요강인가요? 졸졸졸 귀를 열어보세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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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목 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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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날에 오기 적당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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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을 싸올 걸 그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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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유한 강물이 바위를 뚫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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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이런 바위가 눈에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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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바위, 들여다보면 물이 여울진 흔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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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이 바위를 조각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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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운 곡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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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나온 분들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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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하지만, 마음을 내어준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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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사시는 화가 안순덕 님의 전시장도 있습니다

지난 98년 11월에 개봉한 영화 < 아름다운 시절 > 은 6·25전쟁 직후의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이광모 감독과 안성기, 이인 등의 배우들이 열연한 예술극영화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아버지 최씨가 미군부대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나날이 나아져 가는 성민의 집과는 반대로 창희네는 의용군으로 끌려간 채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어머니 안성댁이 힘겹게 살림을 꾸려간다. 최씨의 알선으로 미군의 세탁 일을 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빨래를 모조리 도둑맞는다.

단짝인 성민과 창희는 동구 밖 방앗간에 숨어 들어갔다가 안성댁과 미군 하사의 정사장면을 목격한다. 다음날, 방앗간에 불이 나서 미군 한 명이 사망하고 창희가 실종된다. 이듬해 여름, 늪에서 미군의 밧줄에 묶인 채 심하게 부패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고 그 시신이 창희라고 생각한 성민은 아이들과 함께 작은 무덤을 만들어준다.

이 영화를 볼 때 강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미군들의 옷이 인상적이었다. 그 강이 바로 이 섬진강 장구목이다.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 강의 전경이 화면 가득 펼쳐질 때, 분명 가보고 싶은 마음이 설렜던 곳이다.

장구목에 관련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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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장날 풍경



 삼례 시장은 북적북적합니다. 없는 것이 없습니다. 특히 1번 국도변의 닭집에서 파는 닭은 튼실하고 맛있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닭장이 텅 비어버릴 것입니다. 닭장에서 꼬꼭 울던 닭도 그리워 질 것입니다. AI가 무엇인지, 추억을 잡아먹어 버립니다. 여러분들도 서둘로 재래시장에 나가보세요. 언젠가 사라질 풍경들이 주름지게 살아 있는 것을 보세요. 허름한 노점에서 꽈배기도 먹어보고, 할머니 앞에 쭈그려 앉아 실랑이도 펼쳐보고, 염치 없이 맛만 보고 돌아서 보세요. 이제 닭장 속에는 깃털만, 다시는 볼 수 없나요? 희생을 해야하는 닭집 주인장들의 마음이 여기까지 들려요. 

닭장 속의 닭처럼 / 길상호

 이제는 갇혀 사는 것에 익숙해있다
그림자 끌고 다니다가 하루가 가면
어두운 꿈 밖에도 보초 하나 세워두고
나는 잠에 든다, 홍도 동사무소 건너편
닭장 속의 닭처럼 울음도 잊은지 오래
먹이에 길들여진 시간이 깨울 때까지
나는 윤기 잃은 깃털을 덮고 구석에
웅크리고 자리라, 새벽 늦게 발자국 들이
나의 꿈자리를 밟고 다가와 드르럭
철문을 열기도 한다, 그때마다 옆에 누웠던
지친 그림자 하나씩 데리고 간다
이미 나는 더 빼앗길 것이 없으므로
잠꼬대처럼 뒤척이고 말뿐 깨지않는다
그러나 어떤 날은 새하얀 무정란을 품고
앓기도 하였다, 나는 살아 있는 것인지
툭툭 나의 껍질 두드려 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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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장날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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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 시장에서 잘 나가던 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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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디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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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둘러보았습니다. 코딱지만한 동네라 딴짓하며, 휘파람 불며 걸어도 삼십 여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동네를 더디게 더디게 걸었습니다. 걷다보니 빠르게 걸을 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봇대를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 덩쿨과 담벼락의 낙서까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발전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았던 동네는 수천, 수만 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너질 것 같은 모퉁이와 탱탱하게 솟은 모퉁이, 구부러진 골목과 올곧게 뻗은 골목까지 똑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무로 만든 문, 삐닥한 문, 옹이가 박힌 문, 녹슬어 가는 문, 색이 벗겨져 가는 문. 조그마한 동네의 모든 문이 서로 다른 얼굴로 골목골목에 박혀 있습니다. 문은 아무나 열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친한 집이라고 해도 밀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똑똑똑 두르려 기척을 하거나 주인을 불러냈을 때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은 서로 닮을 수는 있어도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문은 어떤 모습인가요? 굳게 잠겨 있나요? 아니면 문을 열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나나요? 언제나 열려 있어서 누구나 당신의 마음을 훔쳐볼 수 있나요? 오늘 주륵주륵 내리는 비가 그치면 동네를 한 번 천천히, 산책해 보셨으면 합니다. 골목골목에 달린 문을 보며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달려 있는 문을 하나, 하나 챙겨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문과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문 앞에 서서 사진을 찍어보는 것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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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삼례읍


 문이 없으면 저 개나리처럼 지붕을 넘을 수 밖에 없겠죠. 문이 없으면 내가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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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삼례읍


 문이 없으면 벽에 이삿짐센타의 전화번호가 찍힐 필요가 없겠죠. 밖에 나갈 수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겠죠. 문이 없으면 벽은 그저 벽이 될 뿐입니다. 문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첫번째 통로이자 마지막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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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삼례읍


 문이 없으면 벽은 허물어집니다. 문이 뚫리면 나와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벽은 언젠가 문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문은 또 벽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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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삼례읍


 내 문은 언제나 삐그덕, 쿵 소리가 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사람 사는 맛이 날테니까요. 동네에 숨어 있는 폐가가 안타깝습니다. 이곳에 살던 주인은 또 어느 곳에 문을 내고 밥을 지어 먹으며 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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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내소사


 문은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문을 이쁘게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길 쪽으로 내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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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대문이 없는 집도 있습니다. 때론 문 앞에 의자를 내어둡니다. 주인은 저 의자에 앉아 볕을 쬐며 거리를 바라보겠죠. 낡은 미닫이 문에선 드르륵 번개치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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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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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앗간은 안에서 기계소리가 나오는 동안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앗간의 문에서는 참기름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쌀 빻는 소리가 들립니다. 방앗간의 문은 언제나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안으로 돌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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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시골의 구멍가게는 정류장의 역할도 맡습니다. 저 구멍가게로 수많은 사람들이 잔돈을 바꾸려고 들어갔겠죠. 문은 그럴 때마다 친절하게 비켜 서 주었습니다. 잔돈을 바꾼 사람은 껌을 씹으며, 담배를 피우며 문앞의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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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문과 문이 이어져서 집을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문과 문이 서로 내통하고 있습니다. 저 끝집의 소식을 약방 아저씨사 들을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죠. 여름 저녁이면 이곳 사람들은 문을 열고 나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을지도 모릅니다. 삽겹살 냄새가 거리에 가득 풍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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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서원의 문입니다. 아주 오랜 옛날, 백성들은 이곳을 지날 때 멈칫 했을지도 모릅니다. 백성을 마구 부려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세금도 내지 않고 제 배만 불리기 바빴을지도 모릅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이젠 열렸습니다. 누구나 서원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권력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청와대의 문은 언제나 열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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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마을 회관에 달린 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회의를 하겠죠. 때론 누구네 생일에 돌린 떡을 이곳에서 나눠 먹을 것입니다. 마을 회관의 문은 누구보다 동네 소식을 많이 알고 있겠죠. 저 문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납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걸죽한 막걸리 냄새도 풍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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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참 신기한 문입니다. 밖에서 문을 걸어잠글 수 있는 문입니다. 안쪽에서 문을 걸어잠글 수 없습니다. 주인은 왜 문을 거꾸로 달아놓았을까요? 거꾸로 문을 달아놓은 사람은 어쩌면 세상을 집 삼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손바닥만한 마당을 세상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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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옛집의 문은 세월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옹이와 나이테를 간직하며, 손때를 묻히며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문지방이 닳고 닳도록 살아왔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저 문이 젊었을 땐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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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진 문을 봅니다. 문은 어디로 갔을까요? 문이 있던 자리, 문이 있어야할 자리가 텅 비어 있습니다. 이젠 저 문을 두르리고 도망갈 꼬마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안을 엿볼 수 있는 집,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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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삼례읍


  모퉁이가 무너져 내린 집과 모퉁이에 금이 간 집 사이에 문이 달려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일까요? 오랫동안 저 문은 저 모습 그대로 멈춰 있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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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한옥마을


 저 문을 열면 저 문의 주인은 좋아합니다. 안에서 걸어잠그지 않는 이상, 누구나 함부로 열고 들어가도 됩니다. 차 한 잔 시켜놓고 오랫동안 수다를 떨어도 됩니다. 문에서는 수다 소리가 그치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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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한옥마을


 녹이 슬었습니다. 문고리를 물고 있는 사자 두마리. 아니, 한 마리는 문고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동네에 달려 있는 문에서는 사자가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사나운 사자도 있겠죠. 넉넉하게 웃기만 하는 사자도 있겠죠. 언제나 으르릉 대는 사자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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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한옥마을


 기와를 얹은 멋드러진 문입니다. 골목 끝에서 골목을 바라보는 문.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골목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만보니 문이 약간 삐닥하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밑을 파서 아귀를 맞쳤군요. 때때로 저런 문 앞에서 오랫동안 골목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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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한옥마을


 서점이 있던 자리. 이젠 퀘퀙했던 헌책의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멀쩡한 아버지의 책을 팔아 혼이 나던 꼬마들도 없습니다. 사라져가는 풍경들이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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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한옥마을


 벽과 문을 구별 할 수 없습니다. 온통 파란색 칠이 되어있는 집. 처음 저 집을 찾는 사람은 한 참 집 앞에서 서성일지도 모릅니다. 문을 찾으면서 말이죠. 그러나 서성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장 따뜻한 곳이 문입니다.